82년, KBO의 시작과 함께
현재 27년 째를 마무리 지어가고 있으면서,
숱하게 많은 선수들이 나왔고, 프로야구 역사상 한획을 그었던 선수들도 여럿 등장했습니다.
아직 30년도 안 된 짧다면 짧은 역사지만,
MLB나 NPB 못지 않은 레전드 급의 선수들도 많이 배출했던 한국 야구 KBO.
앞으로 그 선수들을 기리는 의미에서 한 명씩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가장 먼저 올릴 선수는 국내 최고의 좌완으로 군림했던 야생마 이상훈 선수입니다.
한국에서의 선수 생활이 채 10년도 되지 않았지만, 누구보다도 최고의 자리에서
자존심 하나로 공 하나하나를 던졌던 삼손 이상훈.
이상훈(좌투좌타)
1971년 3월 11일 생.
서울고-고려대 졸업
(역대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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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은 고려대 시절 자주 팀 숙소를 이탈해 "빠삐용"이란 별명까지 얻었던 반항아였다.
하지만 故 최남수 고려대 전임 감독의 보살핌은 그치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이상훈이 이탈 후 발견되는 곳은 술집이나 유흥가가 아닌,
항상 막노동 공사판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상훈은 신길동 6평에 불과한 옥탑방에서 홀어머니와 둘이서 살고 있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집안 형편 탓에, 야구를 한다는게 늘 사치로 여겼던 이상훈을
뒤에서 굳게 믿어주고 밀어주었던 故 최남수 감독 덕에 이상훈은,
불같은 강속구로 고대 4학년 때 성균관대 전에서 14타자 연속 탈삼진이라는 전후무후의 대기록을 달성하게 된다.
당시, 이례적으로 9시 뉴스에 대학 야구선수로 소개되었던 이상훈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신인사상 최고액인 2억원을 받으면서 LG 트윈스에 입단한다.
(당시 선수지명권을 가지고 있던 OB와 LG는 이상훈을 잡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나, 결국 우선지명권이 있던 LG로 입단.)
그의 화려한 선수생활 소개에 들어가기 전, 한가지 일화를 언급하고자 한다.
왜 이 선수가 사나이 이상훈인지를..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지금은 병상에 누워있는 전 롯데 포수 임수혁 선수는 이상훈의 고대 1년 선배였다.
대학시절, 임수혁 선수의 집안사는 말이 아니었는데..
그도 그럴것이,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하고 어머니는 늘 병상에 누워만 계셨다.
임수혁 선수는 이를 악다물고, 겨우겨우 야구에 전념하고 있는데
엉뚱하게 빠삐용 이상훈이 그 무렵 또 잠적해 버린 것이었다.
팀 동료들은 '이 녀석..또 병이 도졌구나' 등으로 당연하게 여겼었고 다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리고 한달 보름여 후가 지난 후, 이상훈은 학교로 돌아오고 그의 얼굴은 운동 할 때보다 더 새까매져 있었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 뒤로 임수혁을 데리고 가서 그는 임수혁에게 흰 봉투 하나를 내민다.
"형..내가 해 줄 수 있는게 그것밖에 없수..그래도 운동 열심히 해.."
그 흰 봉투 안엔 그가 45 여일간 건설현장, 부산자갈치시장 등에서 노동력을 제공하고 받은 보수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9승 9패 7완투 3.76 150 2/3이닝 131탈삼진)
데뷔 연도인 93년.
그는 전반기에는 신인으로서 괜찮은 활약을 보여주지만,
후반기에는 부상/체력저하 등이 겹쳐서 9승9패 3.76이라는 성적으로 시즌을 마무리한다.
신인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지만 때는 93년..
내노라하는 야구천재들이 알을 깨고 나오는 해였다.
입단 동기였던 이종범 (0.280 133안타 16홈런 73도루),양준혁(0.341 130안타 23홈런 90타점) 등의
걸출한 성적으로 양준혁은 신인상을, 이종범은 골든글러브와 한국시리즈MVP를 차지한다.
이를 곁에서 지켜보고만 있을 삼손이 아니었다.
(18승 8패 6완투 2.47 189 2/3이닝 147탈삼진)
그는 화려하게 94년을 자기의 해로 만든다.
프로데뷔 2년만에, 조계현과 함께 공동 다승왕을 차지하면서 전년도 가슴앓이를 완벽히 설욕한다.
한국시리즈에서도 태평양을 상대로 두 경기 등판 1승 2.19 12 1/3이닝 12탈삼진을 기록하면서,
트윈스의 두번째 우승에 일조하게 된다.
당시 , LG Twins 에 대한 설명이 빠질 수 없는게,
필자가 생각해도 그 당시의 엘지 트윈스 야구는 타팀 팬 입장에서도 말 그대로..신바람 나는 야구였다.
유지현-김재현-서용빈의 무서울 것 없던 신인 3인방.
한대화-노찬엽-최훈재의 베테랑들.
이상훈(18승)-김태원(16승)-정삼흠(15승)-인현배(10승)의 막강 선발진.
마무리는 5승 5패 30세이브의 김용수.
이들은 한국시리즈에서도 일말의 주저함이 없었다.
단 1패도 하지 않은 채 4연승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20승 5패 12완투 2.01 228 1/3이닝 142탈삼진)
데뷔2년차 징크스를 가뿐하게 즈려밟아주고 공동다승왕을 차지했던 작년을 뒤로하고,
이상훈은 95년..더더욱 강해져서 나타났다.
90년 선동열의 20승 이후, 그 누구도 근접하지 못했던 기록에 이상훈이 기록을 새기게 된다.
더욱 주목해야 할 점은 , 그것이 모두 선발 20승이라는 데 있다.
당시 이상훈의 성적은 다승왕/승률왕/이닝1위/완투2위/완봉2위/피안타율 0.219/WHIP 0.88
하지만, 디펜딩 챔피언 LG는 전년도 같지 않은 모습의 김재현,한대화,김태원 등으로
PO에서 롯데에 패하며 주저 앉게 된다.
이상훈 역시 과도한 등판으로 인해 PO롯데전에서 3경기 1패 1세이브 10.38 3홈런 10자책을 기록하면서
아쉽게 시즌을 마무리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이 역사적인 시즌 기록에도 불구하고,
시즌 MVP도 라이벌팀인 OB의 김상호에 돌아가게 된다.(0.272 25홈런 101타점)
(3승 3패 10세이브 2.54 99 1/3이닝 95탈삼진)
이상훈은 마무리로 이듬해 돌아온다.
그러나 그를 늘 괴롭혔던 부상으로 인해 96년에는 큰 활약을 펼치지 못하고 시즌을 접게 된다.
(손가락 혈행장애, 습관성 어깨 탈구)
그 해 LG는 이상훈의 다소 부진함과 함께 가을야구에도 진출하지 못하게 된다.
(10승 6패 37세이브 2.11 85 1/3이닝 103탈삼진)
전년도의 LG 가을야구 불참이 자기 때문이라 여겼을까..
97년 이상훈은 완벽하게 마무리에 적응하면서 47세이브포인트라는 당시 신기록을 세우면서 부활한다.
더군다나 85 1/3이닝만을 던졌음에도 103탈삼진이나 잡아냈다는 것에서 그의 위력적 구위를 상상할 수 있으리라.
선발 20승의 한국 최고의 좌완선발이 한국 최고의 마무리로 보직 변경에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LG는 이런 이상훈에 힘입어 94년 이후 3년만에 KS에 진출하게 된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93년 입단동기였던 이종범이 다시 한번 이상훈의 발목을 잡게 된다.(이종범 시즌 0.324 157안타 30홈런 64도루 112득점)
KS에서 1경기 등판해 이종범에게 결승 스리런을 맞고 패전투수가 된 것이다.
이상훈은 또다시 무리한 등판으로 인해 PO자책 4.66 KS자책13.50을 기록하면서 주저앉는다.
결국 97년은 타이거즈의 V9이자 마지막 우승연도로 끝마치게 된다.
여기서 개인적인 얘기를 잠시 하자면,
이 마무리 시절의 이상훈은 필자에게 하나의 감동 그 자체였다.
야구 중계를 조금이라도 보시거나 야구장을 찾으시는 분들은 다들 아시겠지만,
예전에도 보통 그랬거니와 요즘도 그렇듯이..
투수 교체시 다들 감독의 손짓이 있으면 불펜에서 몸 푸는 투수들이 천천히 마운드로 올라온다.
어차피 시간도 주어진 것이니 이를 비난 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마무리 시절의 이상훈은 늘 한결같았다.
감독이나 코치의 콜이 있을 때면 언제나 그랬듯이..기나긴 사자갈기 같은 머리칼을 휘날리면서
마운드로 전력질주해서 뛰어올라갔었다.
또한, 그는 자존심이 무척이나 강했었기에,
그의 빠른 직구를 상대 타자가 섣불려 건드려 파울볼이라도 난다 치면,
그 다음 공은 똑같은 코스로 찔러넣는 습관이 있었다.
"어쭈 이걸 쳐? 한번 또 치나 보자 .."는 식이 었던 걸로 기억한다.
몰론, 이와 같은 결과가 마무리 시절엔 중요한 상황에서 팀의 패배로 불러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필자는 그의 그런 대단한 강심장에 늘 감탄했었다.
97년 시즌을 마치고, 그는 돌연 해외진출을 선언한다.
당시 늘 스포츠신문 1면을 장식했던 그의 기사.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그를 보고 대단하기 보단, 방자하고 시건방진 선수라 여겼던게 대다수였다.
하긴, 당시 국보급 투수였던 선동열 역시
일본진출시 그 성공여부가 불확실한 상황이었기에 ..
(비록 한국에서의 이상훈 위력은 여전히 대단했지만) 이상훈의 해외진출 성공을 점치는 사람은 드물었다.
98년 미국으로 날아갔지만, 결국 협상이 결렬되고,
이상훈은 98,99년은 일본 주니치에서 뛰게 된다.
비록 겉으로 보이는 큰 활약은 아니었지만,
99년 이상훈은 이종범,선동열과 함께 주니치를 11년만에 센트럴리그 우승을 차지하는데 일조한다.
2시즌 동안 이상훈의 NPB통산성적-45경기 7승 5패 3세이브 3.34 126 2/3이닝 98탈삼진
99년 시즌이 끝난 후, 이상훈은 다시 한번 MLB 진출을 노린다.
결국, 보스턴 레드삭스와 3년계약 총액 약 63억원을 받고 꿈의 무대를 밟게 된다.
난 우리 팀 공격이 끝난 후 라이트 뒤에 있는 불펜으로 향했다.
그러던 중 현기증을 느낄 정도로 내 몸이 피곤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제대로 된 피칭을 할 수 없을 정도의 피곤함.
하지만 난 나 자신에게 얘기했다.
"상훈아, 핑계대지마. 그리고 정신차려.
꼭 오늘은 저기에 있는 마운드에 올라가서 던져야해.
저기에 올라가서 던지기 위해 다 버리고 왔잖아.
홈런을 맞아도 괜찮고, 뭘 해도 괜찮아.
너 자신에게만 부끄럽지 않으면"이라고...
- 메이저리그 데뷔전 후 이상훈의 일기
하지만, 그의 미국 야구 생활은 평탄치 못했다.
좌완 스페샬리스트로 스카웃 받았지만,
그는 우타자에 비해 좌타자에 크게 약한 모습을 보였다.
좌투에게 약한 좌완, 중간계투 임에도 홈런을 많이 허용하는 모습,보수적인 보스턴 구단과의 갈등 등등..
그는 결국 2002년 4월 국내야구 복귀를 공식적으로 선언하게 된다.
(7승 2패 18세이브 1.68 85 2/3이닝 92탈삼진)
2년 4개월만에 국내로 복귀한 그를,
인천공항에서 기다리던 수많은 LG팬들이 맞이한다.
국내 구기종목 (축/야/농/배구) 중에서 사상 최고액이던 4억 7천만원의 최고대우를 받게 된다.
이상훈이 복귀한 LG트윈스는 안팎으로 힘든 시기였다.
성적부진으로 감독은 중간에 해임당하고 감독대행으로 김성근감독이 올라오게 되고 턱걸이로 4위를 한다.
이상훈도 5월여부터 야구판에 모습을 보이지만, 7승 18세이브 1점대 방어율이라는 모습으로 단단히 한 축이 된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난다.
4위를 한 LG가 힘겹게 힘겹게 3위 2위팀을 물리치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것이다.
내 기억으로 당시 LG팬들은 광분했었다.
4위팀이 한국시리즈를..그것도 그해 엉망진창이된 LG팀을 이끌고 한국시리즈를 올라간 김성근감독을 연호했었다.
그리고 팬들은 돌아온 삼손 이상훈을 미친듯이 환호했다.
이상훈은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자신의 떠돌이 해외 생활을 보상이라도 받고 싶은 듯 공 하나하나에 혼을 다해 던졌었다.
준 PO(현대 전)에서 2경기 2세이브 0.00 3이닝 탈삼진4
PO(기아 전)에서 4경기 1세이브 0.96 9 1/3이닝 탈삼진 6
정규시즌에서도 혹사 아닌 혹사를 당하면서 불안불안했지만,
이상훈은 이상훈이었다.
준 PO 와 PO에서 0점대 방어율을 선사하면서 팀을 KS로 이끌고 간다.
KS에는 매번 우승 문턱에서 좌절해야 했던 삼성라이온즈.
이상훈은 2차전에서 첫 등판을 하게 된다.
결과는 2이닝 퍼펙트 피칭. 여기서 자신의 KS 첫 세이브를 챙기게 된다.
드디어 시간은 어느덧 6차전.(당시 LG 2승 3패 상황.)
이 날 경기에서 지면 우승을 삼성에 넘겨줘야 했기에, LG선수들은 초반부터 결의를 다지고 나왔다.
초반, 경기는 삼성이 여유롭게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캐넌히터 김재현이 통쾌한 2루타를 작렬시키면서 LG쪽으로 승운을 가져온다.
어느덧 9회말 9:6 LG 리드 상황.
1사에 주자 1,2루에서 이상훈이 등판한다.
사실 이 때 이상훈 선수는 몸이 제 몸이 아니었다.
KS 4차전 59개, 5차전 23개를 던지면서 어깨는 이미 피곤할대로 피곤해졌었다.
그러나 LG로서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상훈이 마운드에 오른 상황에서 상대타자로 라이언킹 이승엽이 등장한다.
당시, 이승엽은 KS에서 1할대의 부진한 타율을 보이고 있었기에 LG쪽에선 이상훈을 더 믿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승엽의 동점 스리런 홈런.
연달아 마해영의 역전 홈런.(이상훈에 이어 등판한 최원호 상대)
다들 삼성의 창단 이후 첫 우승의 감격하고 있을 때,
TV 중계에서는 잠깐이나마 이상훈의 모습을 잡아주었던 기억이 난다.
휘날리던 갈기머리는 멈춰있었고,
그는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4승 4패 30세이브 3.34 56 2/3이닝 55탈삼진)
03년 이상훈은 전년도 팀의 KS진출에 대한 공헌도를 인정받아,
27.7%오른 6억원에 재계약하게 된다.(다시 한번 연봉 신기록 달성.)
시즌 초반 마무리로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시즌이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그는 서서히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결국, 9월 말 습관적인 부상으로 인해 시즌을 일찍이 마무리하게 된다.
(3패 3세이브 1홀드 5.14 14이닝 15탈삼진)
2004년.
LG는 이순철 감독 체제로 확실하게 굳힌다.
여기서 문제가 시작된다.
자율적인 야구의 상징이었던 LG에게 이게 바로 니네들의 문제야..라면서
규율적 야구를 표방하던 이순철 감독.
세간에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는 '라커룸 기타사건'으로 결국 그는 SK로 쫓겨나듯 트레이드 된다.
LG트윈스..
97년도 그의 해외진출 건 때, 그렇게 그의 발목을 잡던건 바로 LG트윈스였다.
국내복귀시에도, 어느팀보다도 빨리 그를 잡으려고 했던 것도 바로 LG트윈스였다.
LG의 한번의 한국시리즈 우승과 세번의 한국시리즈 진출을 견인했던 선수가 이상훈이었다.
LG트윈스 역사상 전후무후 했던 20승 투수이자, 2년연속 다승왕을 기록했던 유일한 선수가 이상훈이었다.
하지만,
신임감독의 말 한마디로,
야구계의 모자란 그릇이었던 어윤태 전 이사장의 생각없던 행동으로
이상훈은 버려지듯이 SK의 신인급 2명과 트레이드 되고 만 것이다.
SK쪽에서는 이상훈의 자존심을 살려주기 위한 연봉 삭감없이 6억원에 그대로 재계약 해준다.
하지만,
이미 상할대로 상한 이상훈의 자존심.
최악의 경기를 보이면서 SK팬들에게 조차 6억원짜리 방화범 소리를 듣던 그 때,
결국 그는 은퇴를 결심한다.
은퇴관련영상-http://news.naver.com/tv/read.php?mode=LSS2D§ion_id=§ion_id2=&office_id=052&article_id=0000039250
그의 존재가 각인되어 있던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의 예상보다 일찍은 은퇴를 놀라워했고, 안타까워했었다.
하지만 난 그의 은퇴를 접하면서 다시 한번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를 새삼 느끼게 되었다.
위에서 줄곧 적었듯이,
그렇게 집안 형편의 어려운 가운데서도 그의 3억이상의 잔여연봉을 포기했었다.
그는, 있는듯 없는듯 그런 선수가 아닌,
최고의 선수로서 , 불같은 강속구를 뿌리는 갈기머리 삼손으로서 그의 존재를 기억시키고 싶었던 것이리라.
당시 프랜차이즈 스타를 모두 방출시키고 팀의 기강확립을 새로이 한다던 트윈스.
이상훈이 떠난 후, 그해 LG는 6위로 추락했고,
올해가 5년째가 되었지만, 그 이후로 한번도 4강권에 진입한 적이 없다.
몰론 결과론적인 얘기겠지만, 이상훈 등의 방출이 팀에 있어서
독이 되었으면 독이 되었지 결코 호재는 아니었다는 말 일 것이다.
*덧붙여서, 이상훈 선수하니..김성근 감독님을 빼놓을 수 없을 거 같다.
지금이야 뭐, sk제국의 리더이자 누구나 인정하는 명장이지만,
김성근 감독에게 있어서 lg란 가슴 한 구석에서 좋지 않은 기억이리라.
그리고, 아쉬운 소리 하나 하자면..
이상훈 뒤에 김성근 감독이 있었더라면 그렇게까지 은퇴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최고의 모습을 팬들에게 보여주지 못해서 은퇴한다는 삼손이었지만,
투수 특히 좌완투수를 조련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김감독이 있었더라면 절대로 그렇게 은퇴하지는 않았으리라.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서 하나 소개할까 한다.
그 날은 이상훈이 3게임 연속으로 등판해서 지쳐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날 경기도 박빙이어서 꼭 잡아야할 경기였었는데,
갑자기 이상훈이 글러브를 들고 불펜으로 뛰쳐나가는 것이었다.
김성근 감독이 물었다.
"너 어디가?"
이상훈은 "저 밖에 던질 투수가 없지 않습니까?"
다시 조심스럽게 이상훈에게 물었다.
“나갈수 있겠냐”
이상훈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갈 수 있겠냐고 묻지 마시고 나가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언제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
“너도 남자고 나도 남자다. 같은 남자끼리 더 할 말 있느냐. 서로 알아서 하는거다”
“예. 저도 남잡니다”
이렇듯, 둘은 서로 눈빛만으로도 통했던 사이였고, 이는 막강 현대,기아를 격파하고
당시 최강전력의 삼성을 위협했던 LG의 가장 큰 힘으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그는 2002년 이후 LG의 홈페이지에다 대고 정면으로 김성근 감독의 퇴임에 대한 부당함을 성토했고,
어떤 보복이 있어도 감수하겠다고 했었다.
삼손이 이런 행동을 한데는 전부 이유가 있는 것이다.
팬들에게는 혹사일 지 모르지만,
그 선수들에게 당시의 투구는 혹사가 아니라 우승을 위해 한마음으로 골을 향해 뛰다 무리가 갔을 뿐인 것이다.
그는 지금 기타리스트로서 제 2의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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