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을 던졌던 사나이 "슈퍼 베이비" 박동희


 

박동희 (1968.1.4-2007.3.27)

 

박동희선수는 프로 데뷔 이전에 봉황대기에서 맹활약을 합니다.

그 당시 봉황대기는 선수보호 차원으로 선발 이닝 규정이 한경기 5이닝 까지인 대회였습니다.

그 대회에서 박동희는 30이닝을 투구, 피안타 10개로 40개의 탈삼진을잡고 0.00의 방어율을 기록합니다.

첫경기에서만 탈삼진 10개를 잡았으며, 대회에서 노히트노런으로 MVP로 뽑히게 됩니다.

 

그리고 88년 올림픽에 한국 대표팀으로 출전하게 됩니다.

그 당시 일본에서 엄청났던 노모 히데오와의 선발 맞대결을 하게 되는데요. 경기는 패하고 맙니다.

하지만 경기이후 많은 메이져리그 스카우터들이 박동희를 데려가려 했으나 병역때문에 포기했다고 합니다.

이어지는 89년 제15회 아시안선수권대회에서도 노모와의 선발 맞대결은 하지만 또 패하고 맙니다.

하지만 박동희의 공이 절대 약했다고만 볼수 없을정도로 화려한 투구를 했었습니다.

 

훗날 노모가 메이져리그에 데뷔했을때 기자들이 박찬호를 지칭하며

"먼저 데뷔해 있는 박을 아십니까?" 라고 묻자

노모는 "알고 있습니다" 라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노모는 박이 올림픽에서 역투를했던 박동희 인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박동희가 먼저 데뷔해 있는줄 알았다고 할 정도로 박동희는 엄청난 투수였습니다.

 

당시 아마 시절부터 제2의 선동열이라고 엄청 난리가 났었습니다.

고려대학교 졸업이후 1990년 그는 롯데에 입단하게 되는데요.

계약금 1억4천만원 연봉 1200만원으로 총 1억5천200만원으로 당시 어마어마한 금액이였습니다.

(하지만 1년뒤 정민태가, 3년뒤 이상훈이 그 기록을 깨버렸다고 합니다.)

 

박동희의 대망의 데뷔전!! 삼성과의 경기였습니다.

사람들은 선동열을 이을 거물이 데뷔한다는 것만으로도 엄청 기대를 하고 경기를 지켜봤습니다.

데뷔전. 6타자 연속 탈삼진을 기록하고 홈런을 한방 맞은뒤 다시 삼진을 잡고 내려갔습니다.

실로 엄청난 피칭이였고 140대 중후반만 보아왔던 프로 선수들도 박동희의 150Km가 넘나드는 구속을 놀라했습니다.

데뷔 첫해, 10승 7패 7세이브 삼진 146개를 잡아내며 신인왕 후보에도 올랐지만 당시 활약한 포수 김동수가 차지하게 됩니다.

 

게다가 더욱의미가 있는것은 그의 150Km 였습니다.

최동원의 비공식 159Km 선동열이 선발로 150Km만 찍어도 신문 기사에 나오던 시절 한경기에 2,3번 150을 찍어대니 엄청 놀라운 구속입니다.

(대학에 재학중이던 정민태와 구대성도 150Km를 기록했다는 기사도 나왔다고 합니다)

 

90년 일화를 한가지 더 말해본다면 롯데는 암흑기였습니다.

시즌 도중 감독이 사퇴할 정도로 롯데는 위기였습니다.

당시 박동희 선수와 윤학길 선수가 씁슬한 마음에 술을 먹는데 롯데팬분들이랑 성적과 함께 시비가 붙어서 싸움이 났다고 하네요 그림입니다.

 

그림입니다.

 

90. 10W 7L 7S 3.04

 

91년 그는 2년차 징크스 따위는 묻어두고 최고의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14승 9패 3세이브 2.47 10완투 1완봉 이라는 기록입니다.

다승 7위, 평균자책점 6위, 탈삼진 4위를 기록하며 이름값을 제대로 했습니다.

그러나 삼성과의 플레이오프에서 어이없는 보크를 내주며 팬들에게 엄청 욕을 먹으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박동희는 그 실수를 만회라도 하듯이 10이닝 15삼진 4피안타를 기록하며 질 경기를 무승부로 만회합니다.

그 경기 최고구속은 153Km.

 

그림입니다.

 

91. 14W 9L 3S 2.47

 

92년부터 서서히 박동희는 막을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무리한 혹사는 아니였지만 제구가 안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코치진들이 투구폼 수정을 요구했고, 박동희는 투구폼 수정을 실패하고 맙니다.

그 결과 박동희가 매경기 뿌려대던 150Km 또한 거의 볼수 없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박동희가 세웠던 프로 최고 구속도 선동열의 마무리 전향이후 깨지게 됩니다.

그러나 큰경기에 강했던 에이스 본능이 살아났던 걸까요. 한국시리즈에서 역투를 합니다.

한국시리즈 2승1세이브로 한국시리즈 MVP와함께 팀우승을 이끕니다.

 

그림입니다.

 

92. 7W 4L 1S 4.13

 

93년 박동희는 투구폼 변경 실패로 인한 어려움이 컸습니다.

하지만 5월 쌍방울과의 경기에서 신들린듯 공을 뿌려대며 신들린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쌍방울 타선은 박동희의 140 중반을 찍는 공에 맥을 못치리며 5회동안 신나게 노히트노런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6회 비가오며 경기가 취소되며 박동희의 노히트노런은 물건너 가며 비공식으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그림입니다.

 

93. 6W 11L 1S 3.79

 

94년 박동희는 마무리로 전향합니다.

당시 엄청난 포스는 아니였지만 선발이였을때 보다 구속도 빨라졌고 제구도 안정적이였습니다.

30세이브를 기록하며 롯데 구단 역사상 가장 많은 세이브를 기록하였습니다.

(아마도 94 박동희는 레어가 나오겠죠?)

 

그림입니다.

 

94. 6W 5L 31S 3.01

 

95년 또한 마지막 불을 태우셨습니다. 비록 규정이닝 미달이지만 마무리로서 1점대를 찍으며 다시 예전의 구위를 되찾은듯 했습니다.

 

그림입니다.

 

95. 5W 3L 14S 1.50

 

96년 박동희는 부진에 투구폼수정 실패에 부상까지 겹치며 더 이상 재기는 힘들어 보였습니다.

롯데는 부상의 원인이 뭔지도 모른다는 듯이 박동희를 가만히 두었습니다.

 

그림입니다.

 

96. 4W 5L 1S 3.88

 

97년 삼성과 롯데는 이동수, 박석진과 박동희, 김종훈을 트레이드하게 되었습니다.

삼성이 박동희의 경험을 높이사서 롯데가 1년간 쩔쩔매던 박동희의 부상을 3개월만에 치료하며 재기에 나섰습니다.

다만 97년은 회복이 덜 되어 쉬어 넘어갔습니다. 1경기 출장 1이닝 1삼진.

 

그림입니다. 그림입니다. 그림입니다. 그림입니다.

 

년도

방어율

경기수

홀드

완투

완봉

이닝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1998

삼성

6.86

16

1

3

0

0

0

0

39 1/3

51

8

21

29

31

30

1999

삼성

11.25

7

0

1

0

0

0

0

12

20

3

7

16

15

15

2000

삼성

5.49

19

4

0

0

0

1

1

57 1/3

66

6

37

37

40

35

2001

삼성

6.15

18

2

2

0

0

0

0

45 1/3

54

10

22

22

37

31

 

하지만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2002년 방출 당합니다.

은퇴후에도 많은 팬분들이 운동하는 그를 만나 야구 연습을 했다고도 합니다.

59승 50패 58세이브 좋은 기록이 아닐수는 있으나 그가 보여준 직구하나 만큼은 분명 한국 야구 역사에 한획을 그엇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업을 하던 도중 그는 2007년 3월 22일 39세의 나이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림입니다.

(출처-http://www.busanilbo.com/news2000/html/2007/0409/080020070409.1021110828.html)

 

No.21 불꽃을 던졌던 슈퍼 베이비 박동희. 다시는 그의 모습을 볼수 없다는게 너무나도 아쉽습니다.

프로에서 힘들었던 것을 다 버리시고 하늘에서도 150Km의 광속구를 던지시기 바랍니다.

 

박동희 선수가 사망한 뒤 운구차가 사직구장에 왔을때 팬들은 모두 기립박수를 하고 전광판에는 글자가 나타났습니다.

 

"사직 밤하늘에 별이 되소서."

 

진심으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제 긴글 읽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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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을 던졌던 사나이 "슈퍼 베이비" 박동희


 

박동희 (1968.1.4-2007.3.27)

 

박동희선수는 프로 데뷔 이전에 봉황대기에서 맹활약을 합니다.

그 당시 봉황대기는 선수보호 차원으로 선발 이닝 규정이 한경기 5이닝 까지인 대회였습니다.

그 대회에서 박동희는 30이닝을 투구, 피안타 10개로 40개의 탈삼진을잡고 0.00의 방어율을 기록합니다.

첫경기에서만 탈삼진 10개를 잡았으며, 대회에서 노히트노런으로 MVP로 뽑히게 됩니다.

 

그리고 88년 올림픽에 한국 대표팀으로 출전하게 됩니다.

그 당시 일본에서 엄청났던 노모 히데오와의 선발 맞대결을 하게 되는데요. 경기는 패하고 맙니다.

하지만 경기이후 많은 메이져리그 스카우터들이 박동희를 데려가려 했으나 병역때문에 포기했다고 합니다.

이어지는 89년 제15회 아시안선수권대회에서도 노모와의 선발 맞대결은 하지만 또 패하고 맙니다.

하지만 박동희의 공이 절대 약했다고만 볼수 없을정도로 화려한 투구를 했었습니다.

 

훗날 노모가 메이져리그에 데뷔했을때 기자들이 박찬호를 지칭하며

"먼저 데뷔해 있는 박을 아십니까?" 라고 묻자

노모는 "알고 있습니다" 라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노모는 박이 올림픽에서 역투를했던 박동희 인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박동희가 먼저 데뷔해 있는줄 알았다고 할 정도로 박동희는 엄청난 투수였습니다.

 

당시 아마 시절부터 제2의 선동열이라고 엄청 난리가 났었습니다.

고려대학교 졸업이후 1990년 그는 롯데에 입단하게 되는데요.

계약금 1억4천만원 연봉 1200만원으로 총 1억5천200만원으로 당시 어마어마한 금액이였습니다.

(하지만 1년뒤 정민태가, 3년뒤 이상훈이 그 기록을 깨버렸다고 합니다.)

 

박동희의 대망의 데뷔전!! 삼성과의 경기였습니다.

사람들은 선동열을 이을 거물이 데뷔한다는 것만으로도 엄청 기대를 하고 경기를 지켜봤습니다.

데뷔전. 6타자 연속 탈삼진을 기록하고 홈런을 한방 맞은뒤 다시 삼진을 잡고 내려갔습니다.

실로 엄청난 피칭이였고 140대 중후반만 보아왔던 프로 선수들도 박동희의 150Km가 넘나드는 구속을 놀라했습니다.

데뷔 첫해, 10승 7패 7세이브 삼진 146개를 잡아내며 신인왕 후보에도 올랐지만 당시 활약한 포수 김동수가 차지하게 됩니다.

 

게다가 더욱의미가 있는것은 그의 150Km 였습니다.

최동원의 비공식 159Km 선동열이 선발로 150Km만 찍어도 신문 기사에 나오던 시절 한경기에 2,3번 150을 찍어대니 엄청 놀라운 구속입니다.

(대학에 재학중이던 정민태와 구대성도 150Km를 기록했다는 기사도 나왔다고 합니다)

 

90년 일화를 한가지 더 말해본다면 롯데는 암흑기였습니다.

시즌 도중 감독이 사퇴할 정도로 롯데는 위기였습니다.

당시 박동희 선수와 윤학길 선수가 씁슬한 마음에 술을 먹는데 롯데팬분들이랑 성적과 함께 시비가 붙어서 싸움이 났다고 하네요 그림입니다.

 

그림입니다.

 

90. 10W 7L 7S 3.04

 

91년 그는 2년차 징크스 따위는 묻어두고 최고의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14승 9패 3세이브 2.47 10완투 1완봉 이라는 기록입니다.

다승 7위, 평균자책점 6위, 탈삼진 4위를 기록하며 이름값을 제대로 했습니다.

그러나 삼성과의 플레이오프에서 어이없는 보크를 내주며 팬들에게 엄청 욕을 먹으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박동희는 그 실수를 만회라도 하듯이 10이닝 15삼진 4피안타를 기록하며 질 경기를 무승부로 만회합니다.

그 경기 최고구속은 153Km.

 

그림입니다.

 

91. 14W 9L 3S 2.47

 

92년부터 서서히 박동희는 막을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무리한 혹사는 아니였지만 제구가 안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코치진들이 투구폼 수정을 요구했고, 박동희는 투구폼 수정을 실패하고 맙니다.

그 결과 박동희가 매경기 뿌려대던 150Km 또한 거의 볼수 없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박동희가 세웠던 프로 최고 구속도 선동열의 마무리 전향이후 깨지게 됩니다.

그러나 큰경기에 강했던 에이스 본능이 살아났던 걸까요. 한국시리즈에서 역투를 합니다.

한국시리즈 2승1세이브로 한국시리즈 MVP와함께 팀우승을 이끕니다.

 

그림입니다.

 

92. 7W 4L 1S 4.13

 

93년 박동희는 투구폼 변경 실패로 인한 어려움이 컸습니다.

하지만 5월 쌍방울과의 경기에서 신들린듯 공을 뿌려대며 신들린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쌍방울 타선은 박동희의 140 중반을 찍는 공에 맥을 못치리며 5회동안 신나게 노히트노런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6회 비가오며 경기가 취소되며 박동희의 노히트노런은 물건너 가며 비공식으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그림입니다.

 

93. 6W 11L 1S 3.79

 

94년 박동희는 마무리로 전향합니다.

당시 엄청난 포스는 아니였지만 선발이였을때 보다 구속도 빨라졌고 제구도 안정적이였습니다.

30세이브를 기록하며 롯데 구단 역사상 가장 많은 세이브를 기록하였습니다.

(아마도 94 박동희는 레어가 나오겠죠?)

 

그림입니다.

 

94. 6W 5L 31S 3.01

 

95년 또한 마지막 불을 태우셨습니다. 비록 규정이닝 미달이지만 마무리로서 1점대를 찍으며 다시 예전의 구위를 되찾은듯 했습니다.

 

그림입니다.

 

95. 5W 3L 14S 1.50

 

96년 박동희는 부진에 투구폼수정 실패에 부상까지 겹치며 더 이상 재기는 힘들어 보였습니다.

롯데는 부상의 원인이 뭔지도 모른다는 듯이 박동희를 가만히 두었습니다.

 

그림입니다.

 

96. 4W 5L 1S 3.88

 

97년 삼성과 롯데는 이동수, 박석진과 박동희, 김종훈을 트레이드하게 되었습니다.

삼성이 박동희의 경험을 높이사서 롯데가 1년간 쩔쩔매던 박동희의 부상을 3개월만에 치료하며 재기에 나섰습니다.

다만 97년은 회복이 덜 되어 쉬어 넘어갔습니다. 1경기 출장 1이닝 1삼진.

 

그림입니다. 그림입니다. 그림입니다. 그림입니다.

 

년도

방어율

경기수

홀드

완투

완봉

이닝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1998

삼성

6.86

16

1

3

0

0

0

0

39 1/3

51

8

21

29

31

30

1999

삼성

11.25

7

0

1

0

0

0

0

12

20

3

7

16

15

15

2000

삼성

5.49

19

4

0

0

0

1

1

57 1/3

66

6

37

37

40

35

2001

삼성

6.15

18

2

2

0

0

0

0

45 1/3

54

10

22

22

37

31

 

하지만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2002년 방출 당합니다.

은퇴후에도 많은 팬분들이 운동하는 그를 만나 야구 연습을 했다고도 합니다.

59승 50패 58세이브 좋은 기록이 아닐수는 있으나 그가 보여준 직구하나 만큼은 분명 한국 야구 역사에 한획을 그엇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업을 하던 도중 그는 2007년 3월 22일 39세의 나이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림입니다.

(출처-http://www.busanilbo.com/news2000/html/2007/0409/080020070409.1021110828.html)

 

No.21 불꽃을 던졌던 슈퍼 베이비 박동희. 다시는 그의 모습을 볼수 없다는게 너무나도 아쉽습니다.

프로에서 힘들었던 것을 다 버리시고 하늘에서도 150Km의 광속구를 던지시기 바랍니다.

 

박동희 선수가 사망한 뒤 운구차가 사직구장에 왔을때 팬들은 모두 기립박수를 하고 전광판에는 글자가 나타났습니다.

 

"사직 밤하늘에 별이 되소서."

 

진심으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제 긴글 읽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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