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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 "18.44m를 던지지 못하는 날까지"

· 댓글개 · potatochip

이상훈 - "18.44m를 던지지 못하는 날까지"


그림입니다.그림입니다.그림입니다.그림입니다.

 

                            

                                              [이상훈  역대기록]

 

그림입니다.

한국 프로 야구 시절

LG 트윈스 시절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1993년LG 트윈스에서 1차 지명으로 데뷔하였다.

1994년LG의 우승을 이끌었으며, 1995년한국 프로 야구 역사상 유일하게 좌완 20승 투수가 되었다.

1996년 손가락 혈행 장애와 척추 분리증으로 인해 선발에서 마무리로 보직을 전환했다.

1997년에는 구원 투수 부문 신기록을 달성하였다.(47SP)

 

 

일본 프로 야구 시절

주니치 드래곤스 시절

1998년1999년에는 일본주니치 드래곤스에서 뛰었으며, 당시 등록명은 그의 별명을 딴 삼손 리(Samson Lee)였다.

 

 

 

메이저 리그 시절

보스턴 레드삭스 시절

2000년부터 2001년까지는 미국보스턴 레드삭스의 산하 마이너 리그 팀인 포터킷 레드삭스에서 주로 뛰었다.

메이저 리그에는 9경기에 등판했다.

 

한국 프로 야구 복귀

LG 트윈스 복귀

2002년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산하의 마이너 리그 팀인 새크라멘토 리버 캣츠로 이적하였으나 시즌 중반에 LG로 다시 돌아왔다.

그 해 한국 시리즈 마지막 경기에서 이승엽에게 동점 3점 홈런을 허용하여 패배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SK 와이번스 시절

이순철 감독과의 갈등으로 2004년1월 14일SK양현석과 오승준을 상대로 트레이드되었다.

3패 3세이브 평균자책 5.14를 기록하고 그 해 6월 2일조범현 감독에게 은퇴 의사를 밝혀 현역에서 물러났다.

 

 

 

 

 

 

야생마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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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스스로가 생각하는 최고의 경기는 4학년이던 1992년, 잠실에서 열린 고연전이다.

이 경기서 그는 연세대를 상대로 완투승을 거두며 대학생활의 마무리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당시 고대에는 이상훈 연대에는 슈퍼루키 선발 임선동과 구원투수로 문동환이 등판 하였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무엇이었나?

92년 연세대와의 정기전이다. 4학년 마지막 경기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돌아가신 최남수 감독님 밑에서 야구를 할 수 있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팀을 이탈하면서까지 말썽을 많이 피웠는데 나를 혼내고 다독이면서 어떻게든 잡아주려고 많은 도움을 주셨다.

프로야구에서 팀이 우승했거나, 일본에서 운동하던 시절 선동렬 선배 이종범 선수와 함께 주니치를 11년 만에 우승으로

이끌었을 때도 기억에 남지만, 이 모든 것이 나를 아껴주신 최 감독님이 계셨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감독님께서도 어렸을 때 홀어머니 밑에서 힘들게 사셨다고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모습에 정이 많이 가셨는지

야단도 많이 치시고, 때리기도 많이 때리셨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따뜻한 마음으로 나를 잡아주셨던 분이다.

-인터뷰365중

 

이상훈의 고려대 재학 시절 별명은 ‘빠삐용’이었다. 4년의 재학시절 동안 야구부에서 도망친 것만 14차례나 됐기 때문이다.

어려운 가정형편에 마음 편히 운동을 할 수 없던 그는 건설현장 막노동, 레스토랑의 주방보조 일을 전전했다.

대학교 3학년 때 우연히 접했던 기타는 선수생활 내내 함께 하며 야구와 뚜렷한 경계 없이 익숙한 것이 되어버렸다.

신인시절 캠프에서는 장기자랑으로 기타를 튕겼고, 연습을 마치고 숙소에 들어와서는 선후배들과 자연스레 노래를 부르며 음악에 심취했다.

그림입니다.

 대학 4학년이 되서야 빛을 발한 이상훈은 그해 대한야구협회로부터 대학 최고투수로 선정됐다. (타자는 동기 마해영)

92년 성적은 12승 2패에 평균자책점 2.39였다. 서울권 두 팀의 극심한 러브콜을 받은 이유였다. ⓒ동아일보

 

 

1992년 봄...

고려대 좌완투수 한명이 9시 뉴스에 소개 되었다.

프로야구 선수도 아닌 대학 야구선수가 스포츠 뉴스도 아닌 정규뉴스에

등장 하는 것 은 야구 붐이 일었던 당시에도 이례적인 일이였다.

투수의 이름은 이상훈

대학춘계리그 에서 성균관대를 상대로 14타자 연속 탈삼진 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하면서 이상훈은 야구판에 자신의 존재를 화려하게 드러낸 것 이다.

"150km/h 를 던지는 왼손투수는 지옥에 가서라도 데려온다"라는 말처럼.

당시 선수지명권을 가지고있는 OBLG는 이선수를 잡기위해 별의별짓을 다했다고.

 

그리고 1992년 늦가을 이상훈은 연고지 우선지명권을 획득한 LG트윈스

신인 사상 최고의 금액인 2억을 받고 입단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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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년 9승 9패  방어율3.76   이닝150 2/3   탈삼진131

 

93년플레이오프(4경기)1승 방어율0.00  이닝14과2/3  탈삼진14 안타6 자책점0 

 

1년 전만 해도 주목을 받지 못했던 이상훈이 아마 최고의 스타로 급부상한 것은

1992년 4월 대학 춘계리그에서 성균관대를 상대로 14타자 연속 탈삼진을기록하면서부터였다.

 

서울고와 고려대를 거친 이상훈은 92년 당시 역대 신인 최고액이던 2억원에 LG 트윈스에 입단

계약금 1억8천8백만원과 연봉 1천2백만원을 합쳐서 총액2억원

프로야구 출범 이후 12년만연봉 2억원 시대를 열었습니다.

 

데뷔 첫해인 93시즌 전반기에는 좋은 경기내용을 보여 주었지만,

후반기에는 체력저하와 부상이 겹치며 최종성적은 9승에 그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상훈에게 신인왕이 돌아갈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때는 바야흐로 1993년 너무나 걸출한 천재들이 데뷔했던 그해...

양준혁이종범은 팀을 각각 1위 2위로 만들어 놓은 쾌거를 기록합니다.

 

신인 투수에게 9승은 적은 승수가 아니지만 프로입문 동기

양준혁이나 이종범과 비교하면 아쉬움이 남는 성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듬해
이상훈은 그 아쉬움을 깨끗이 씻어냅니다.

 

          

 

1993년 프로야구를 지배했던 4명의 신인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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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함의 대명사 2000안타의 주역 양신 양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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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준혁 타율0.341(1위) 130안타(5위) 홈런23(2위) 타점90(2위)  도루4  최우수신인왕

         득점82(2위)  루타(2위) 장타율0.598(1위) 출루율0.436(1위)

 

역대 최고의 1번타자 종범 신 이종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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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범 타율0.280  133안타(2위) 홈런16(4위)  타점53  도루73(2위)

         득점85(1위) 루타(4위) 장타율0.432(7위) 골든글러브,한국시리즈MVP

 

15이닝 181개의 무적투 박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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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충식 14승 7패 2세이브 방어율2.45

 

 

10타자 연속삼진 에이스오브에이스 이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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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진 10승 5패 2세이브 방어율3.11

 

그림입니다.그림입니다.

   94년 당시 이상훈 선수의 모습                  94년 LG트윈스 우승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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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 18승 8패 방어율2.47   이닝189 2/3  탈삼진148

 

94년 한국시리즈(2경기)1승 방어율2.19  이닝12과1/3 탈삼진12 안타12(홈런0) 자책점3

 

프로2년차18승으로 조계현공동 다승왕을 차지하며 LG의 두 번째 우승에 기여한다.

 

지금도 LG트윈스 팬들이 그렇게 그리워하는 그 '新바람 야구'의 절정을 이루었던 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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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현-김재현-서용빈으로 이어지는 신인 3인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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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경기)타율0.305 15홈런 51도루 51타점 신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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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경기) 타율0.289 21홈런 21도루 80타점

신일고졸업 20-20클럽가입, 외야수부분-골든글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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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경기) 타율0.318 4홈런 6도루 71타점

1994년 2차 6순위(전제 41순위) 1루수부문-골든글러브

 

한대화-노찬엽-최훈재등의 할때 해주는 노장 한방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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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경기) 타율0.297 10홈런 3도루 67타점 3루수부문-골든글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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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경기)타율0.297 10홈런 7도루 59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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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율0.324 6홈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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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이기기 시작하면 도무지 질 것 같지 않던 팀, 1994년 LG트윈스

 

자율야구와 투수 분업화의 선구자,이광환 감독,1994년 LG트윈스의 "신바람 야구"는

팀뿐만 아니라 한국 프로야구 전체의 패러다임을 바꾼 일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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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발 투수 이상훈-김태원-정상흠-인현배4명의 10승투수  라인업에 마무리는 김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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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셋업맨 1호. 차동철 (재평가는 또 언제 해줄련지...)

-이광환 감독은 차동철에게 ‘셋업맨’이라는 당시로서는 생소한 보직을 맡겼고 이는 그의 선수 생명을 연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특급마무리 김용수도 그 앞에서 8회를 책임진 차동철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을 게다. 특히 당시에는 생소한 SF볼(일명 반포크볼)

구사해서 주자 있는 상황에서 범타를 유도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한국형 셋업맨 1호.

 

94년한국시리즈에서 LG트윈스는 역대최강의 전력으로 태평양을 상대로 4연승하며 우승

 

 

데뷔2년차이상훈18승의 최고의 활약을 보여주며 팀을 우승하는데 일조합니다.

그리고 타자앞에서 150km/h의 공을 뿌리는 이 선수를 사람들은 삼손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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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둔 직후 주요 일간지 1면에 숡되었던 LG트윈스 우승 기념광고

 

럭키금성? 이란 단어가 참 옛날 생각나게 합니다. 이때만해도 LG트윈스가 최소 2~3년 내에 우승 한번은 더 할줄만 알았다.

LG트윈스 의 우승을 두고 언론에서는 투자자와 선진야구의 합작품 자율야구가 드디어 꽃을 피우다.

컴퓨터를 이용한 세밀안 전력분석,인센티브 제도 등 화려한 용어와 미사여구를 총동원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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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년 20승 5패 방어율2.01   이닝228 1/3  탈삼진142

 

95년이상훈 선수생활의 최정점이었습니다.

 

최악의부진 -플레이오프(롯데전)

95년플레이오프(3경기)1패1세이브 방어율10.38  이닝8과2/3 탈삼진6 안타10(홈런3)자책점10

 

LG가 자랑했던 그 신인 3인방들은 서용빈을 제외하면 유지현은 시즌 중반에 빠져야했고,

김재현은 2년차 징크스에 허덕이고 있었으며,한대화는 더이상 예전같지 않은 그시절...

LG가 연패를 거듭할때도 팬들은 에이스 이상훈의 힘을 믿었습니다.

 

90년 선동렬 이후 5년만20승을 거두며 다승왕2연패하고 승률왕까지 차지한 것. 

228 2/3이닝(1위)을 던진 이상훈은 12번의 완투(2위)3번의 완봉(2위)을 기록했으며,

안타 150개, 볼넷 48개, 사구 3개를 허용하며 피안타율 0.219,

WHIP(이닝당 출루허용률) 0.88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일궈냈다.

특히 20승이 모두 선발승이어서 그 가치는 더욱 빛났다.

 

하지만 정규시즌에서 누적된 피로탓에 포스트시즌에서는 부진을 면치 못했고,

 

그림입니다.그림입니다.

(126경기) 타율0.272 25홈런(1위) 10도루 101타점(1위) 외야부분-골든글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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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MVP도 라이벌 OB김상호에게 돌아갑니다.


이듬해 이상훈은 마무리투수로의 전향을 선언합니다.

 

 

 제2회  1995년 한일슈퍼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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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년 제2회 한일슈퍼게임 (사진출처 - 96년 한화 팬북)

             마해영 이상훈 장종훈 홍현우 김광림

             주형광, 공필성

 

이 당시 한일 슈퍼게임이라고 한.일 프로야구 올스타가 (4년마다) 정기전 식으로 게임을 했는데요.

이때는 한.일 프로야구 수준차이가 분명히 있었던 시절이였죠.

포크볼이라는 구질도 우리나라 타자들에게는 속수무책이였구요.

 

제2회 1995년 한일슈퍼게임2승2무2패 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게 됩니다.

이 당시 이상훈은 2경기에서 13이닝을 던지며 1실점으로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마무리로 변신한 이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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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년 3승 3패 10세이브 방어율2.54  이닝99 1/3  탈삼진95

 

96년도 역시 문제는 무리한 투구였습니다.

 

이미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습관성 어깨탈구손가락 혈행장애라는 고질적 질환으로 인해

96년에는 선수로 뛰는 시간보다 재활하는 시간이 훨씬 많았습니다.

선발과 마무리를 왔다갔다 했지만 부상을 가지고 있는 선수치고는,

그래도 이상훈은 여전히 언터쳐블 이였습니다.

 

이상훈이 무너지면서 그해 가을잔치에 초대받지 못했다는 점을 본다면,

이상훈LG에게 주는 영향이 얼마나 큰것인지 알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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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10승 6패 37세이브 방어율2.11  이닝85 1/3  탈삼진103

 

97년플레이오프(4경기)2승2패 방어율 4.66   이닝9과2/3 탈삼진10 안타7(홈런2) 자책점5

        한국시리즈 (1경기)    1패 방어율13.50  이닝2과2/3 탈삼진 2 안타5(홈런1)  자책점5

 

1년을 건너뛰고 다시 돌아온 1997년, 이상훈마무리 투수로 변신을 했다.

 

나오는 시기만 바뀌었을 뿐 이상훈의 위력은 1995년 20승 투수의 위력 그대로였다.

이상훈은 그해 57경기에 등판해 10승 6패 37세이브, 평균자책점 2.11을 기록 구원부문 1위

이상훈이 기록한 47세이브 포인트는 당시 프로야구 신기록이었다.

 

85 3/2이닝을 던지며 103개의 탈삼진을 뽑아냈을 정도로 구위 또한 위력적이었다.

최고의 선발 투수 이상훈은 다시 최고의 마무리 투수로 프로야구에 우뚝 서게 된 것이다.

 

97년LG트윈스는 3년만에 다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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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경기) 타율0.324 30홈런 64도루(1위) 74타점 유격수-골든글러브.한국시리즈MVP

30-30클럽 (30홈런 64도루 타율0.324 득검1위,도루1위,타격5위,안타2위,홈런2위,타점8위)

프로야구 최초 3할-30홈런-30도루 (1번&유격수)

 

 

하지만 한국시리즈 우승은 이종범의 해태 타이거스가 아홉번째 우승(4승 1패)하게됩니다.

이종범 선수 역시 1997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모기업 사정에 의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일본으로 진출하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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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직구구속과 구질

 

사실 94-95년이상훈직구는 왼손투수 중에는 가장 빠르고 위력이 있었죠,

구위자체는 왼손투수 뿐만 아니라 최고 투수라는 평까지 나왔을 정도입니다.

 

직구가볍다는 평이 지배적입니다.

96년 부상으로 마무리전환이후 이미지가 그렇게 굳어진거 같습니다.

97년 플레이오프와 한국시리즈에서의 결정적인 피홈런으로 굳혀진거 같습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만루홈런 한국시리즈에서는 이종범에게 결승3점홈런을 허용

둘다 직구였던걸로 기억합니다. 직구최고스피드151km/h

 

커브는 95년 한방송프로그램에서 "올해최고의 커브"선정-이상훈 투수의 가장 대표적인 변화구

SF볼은 95년도 전성기 시절  낙차가 크고 상당히 인상적 이었다고 합니다.

슬라이더 130km 전후로 형성,빠른속도에 각이 좋은 편이라 타자들 카운트 잡기에 사용

 

 

해외진출

 

이상훈의 해외진출은 장편소설을 방불케 합니다.

 

LG의 좌완투수 이상훈도 온갖 우여곡절 끝에 일본 주니치 드래건스에 합류했다.

LG구단과 보스턴 레드삭스의 사전계약,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공개입찰 등을 거치면서

이런저런 수모를 겪다 미국진출이 끝내 무산된 이상훈은 야구선수로서'국제미아'가 될 뻔하다가

간신히 주니치에서 새로운 야구인생을 열게 됐다.

 

 

미국메이져리그 진출실패

 

선발로 20승, 마무리로 47세이브 포인트를 기록한 이상훈은 1997년 시즌을 마친 후

데뷔 첫 해 계약금을 놓고 이견을 벌이던 구단에 섭섭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97시즌이 끝난 후

돌연 미국 진출을 선언합니다. LG 역시 개성이 강해 구단과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키던

그의 해외진출을 허락합니다 

 

1997년

 

11월 10일- 마무리훈련 불참 메이져리그 진출의사 발표

12월 24일- 보스톤과계약 공식발표(임대료 250만달러,이상훈 2년연봉 220만달러)

 

그러나 일은 그렇게 매끄럽게 돌아가지 않았다. 해가 바뀌어 메이저리그사무국(MLB)의 빌 머레이

운영국장은 "보스턴과의 독점적인 임대계약은 다른 팀에게 공평한 기회가 부여되지 않기 때문에

마찰의 소지가 있다"면서 이상훈의 미국진출이 잠정유보됐다고 밝혔다.

 

그 대안으로 나온 것이 포스팅 시스템이었습니다. 

일본구단들이 이 제도로 많은 수혜를 받는데 이 시스템의 최초의 선구자는 이상훈이었습니다.


 

1998년

 

1월 21일- 이상훈 신분조회

(MLB는 공개테스트를 거쳐 전구단이 공개입찰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일찍이 없었던 스카우트 방식이었다. 공개테스트라는 것은 한국 최고의 좌완투수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문제였으나 매니저를 자처하는 주변인물들에 이끌려 이상훈은 미국으로 가게 된다.

 

그림입니다.

이상훈이 메이저리그의 공개 테스트를 위해 16일 LA로 떠났다.

 

2월 16일- 미국 LA 도착

2월 20일- 공개테스트

MLB는 "이상훈의 공개훈련을 지켜본 결과 피칭할 수 있는 몸상태가 아님을 확인한 일부 구단의 항의가

있었기에 이를 받아들여 공개입찰 시기를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바꿔 말하면 불합격판정을 받은 것이었다.

 

3월  1일LG정상흠 투수코치 파견(이상훈선수의 훈련을 도와,고액으로 어느구단에라도 낙찰을 기대)

3월 26일- 2차 공개테스트 

 

4월  7일- 보스톤 48시간 안에 새로운 제안 제시 (LG거절,MLB 입찰가격 수정허용불가)

4월  9일- 보스톤 이상훈 임대포기 최종적으로 통보 

 

그러나 결과는 너무나 어처구니없었다. 거의 모든 구단이 참관한 공개테스트 결과

이상훈은 최종적으로 보스턴에 낙찰됐는데 KBO에 통보된 낙찰가격은 당초 포인트빈트가 제시했던

2백50만달러에는 4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60만달러(당시 환율로 8억3천만원)에 불과했다.

그밖에 몇개 구단이 응찰했고 각구단의 제시금액이 얼마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상훈보스턴 이적거래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과연 포인트빈트와 구단행정을 총괄하는

돈 두켓 단장 사이에 어떤 조율이 있었는지도 분명치가 않았다. 

 

단지 돈 때문에 메이저리그 진출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상훈은 " 25만 달러에 계약해 달라.

LG20만 달러를 가져가라 난 5만 달러만 받겠다 " 라며 의지를 나타냈지만

LG이상훈30만 달러만 받고 넘길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당시 이상훈 선수의 실력이 검증이 안되었다고 보기에는 그 당시에는 비시즌 기간이라

몸을 만들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었고,당시 한국프로야구 수준을 트리플A 수준으로 보는것도 있었음으로 아쉬움이 컸습니다.
 

전년도 11월에 현대가 쌍방울 포수 박경완을 트레이드해갈 때도 트레이드머니는 9억원이었다.

아무리 달러환율이 올랐다 치더라도 60만달러라는 돈은 기대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었다.

이상훈의 가치가 박경완보다 못하다는 것은 LG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황당하기는 이상훈도 마찬가지였다. 임대료를 겨우 60만달러로 책정한 것이 이상훈 개인에게는

더 후하게 대우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일단 성사되고나면 더 형편없이 후려칠 것인지 정확히 진의를

파악하지 못해 헷갈리면서도 포인트빈트에게 사기당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들은 메이저리그 진출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뜻밖의 일본프로야구진출 

 

LG구단은 착잡한 심정에 빠져 자매결연 관계에 있는 일본 주니치 드래건스로 방향을 전환,

차선책을 모색했습니다. 모양새가 형편없이 구겨진 이상훈은 도로 국내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갈 수는 없는 처지였습니다.
 

선동열과 이종범에게 이미 자기네 유니폼을 입힌 주니치이토 오사무(伊藤修) 구단대표는

보스턴이 임대포기 의사를 밝힌 이틀 뒤(11일) 기다렸다는 듯이 한국으로 건너와 LG 최종준 단장과

협상을 가졌다. 협상의 결말은 일단 2년간이상훈주니치가 임대하고, 만기가 되어 이상훈

다시 일본에서 뛰게 될 경우 완전트레이드 형식으로 LG와 일본구단이 교섭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구단간 임대료는 2억엔, 이상훈에 대한 대우는 계약금 5천만엔연봉 8천만엔.

 

 

그림입니다.

 

이상훈은 처음에는 자신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협상내용이라며 반발하다가 그 결정을

받아들여4월 25일나고야돔에서 입단식을 갖고 주니치 유니폼을 입게됩니다. 

 

   

*인터뷰식 기사로 이상훈 선수의 여러가지 인터뷰 이야기가 있습니다.

  

박동희의 MR.베이스볼 -야생마 이상훈 제1편

http://blog.naver.com/samsonno/80155235138

 

박동희의 MR.베이스볼 -야생마 이상훈 제2편

http://blog.naver.com/samsonno/80155235174

 

박동희의 MR.베이스볼 -야생마 이상훈 제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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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윈스를 사랑했던 왼손투수 LG투수 이상훈 by 박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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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입니다.

일본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 코리아 3인방

삼손-이상훈 나고야의 태양-선동열 바람의 아들-이종범

 

당시 이상훈 선수의 이름이 삼손 리 였는데. 이는 이종범 선수와 이름이 "이" 똑 같아서 별명으로 하게 되었다는군요.

 


그림입니다.

이상훈 선수의 일본 첫 등판에 기억.

 

일본프로야구로 진출한 이상훈선수. 당시 OBS(?)채널에서 일본프로야구 중계를 해주었는데요.

이상훈 선수의 첫 등판 장면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유니폼에 이름은 삼손 리. 도쿄돔(요미우리 자이언츠 원정경기)

첫 타자에게 솔로 홈런을 허용합니다.아무래도 비시즌에 몸을 제대로 못만들어서 그렇다고 볼수 있겠는데요.

 

4월 입단뒤 6게임에서 10.80의 형편없는 방어율을 기록하며 2군으로 추락했고,6월 부터는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오게됩니다.

 

 

1998년

 

(11경기) 1승 방어율4.68

 

이상훈LG둥지를 떠나기 위해 참으로 먼길을 우회하면서 온갖 수모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그렇게 주니치에 안착했다. 그러나 이상훈은 1996년 선동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본야구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1, 2군을 오르락 내리락하며 11게임에서 1승을 올리는 데 그칩니다.

 

            그림입니다.그림입니다.

당시주니치에는 선동열(나고야의태양) 이종범(바람의아들) 이상훈(삼손) 한국3인방 활동하게됨.

 

레전드 카드만 3명이네요? ^^ 이 선수들이 같은 팀에서 뛰었습니다. 이들의 일본 프로야구 성적은요?

 

선동열(주니치)                                      이종범(주니치)                                      이상훈(주니치)
1996년 5승1패 8세이브 5.50              1998년 67게임 0.283 10홈런 29타점 18도루      1998년 1승 방어율4.68
1997년 1승1패 38세이브 1.28             1999년 123게임 0.238 9홈런 33타점 24도루     1999년 6승 5패 3세이브 방어율2.87
1998년 3승0패 29세이브 1.48             2000년 113게임 0.275 8홈런 37타점 11도루
1999년 1승2패 28세이브 2.61             2001년 5게임 0.154

선동열,당시 첫해 부진 이후,좋은 성적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하셨고,이종범 선수는 일본진출 첫해 정말 대단했었습니다.

하지만 팔꿈치 데드볼을 맞고 골절 그 이후로는 좀 처럼 좋은 활약을 하지못했네요. 당시 호시도 감독의 영향도 있었겠지만요.


 

그림입니다.그림입니다.

                                       일본에서 발행된 스포츠카드 이상훈 선수

 

 그림입니다.그림입니다.

      일본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활약하던 이상훈 (당시 이름 "삼손 리")

 

 

1999년

 

(28경기) 6승 5패 3세이브 방어율2.83

 

동계훈련을 착실하게 준비하며 일본프로야구 2년차이상훈 선수는 좋은 성적을 거두게 됩니다.

주로 중간계투로 활약하면 주니치선동열,이종범11년만센트럴리그우승에 한몫을 합니다.

 

선발 11경기에서 4승4패,방어율 3.50 (69⅓이닝 27자책)

(손가락 혈장장애로 전반기 후반에 중간계투로 보직변경)

 

중간계투 전환 이후 9월9일 한신전에서 끝내기 홈런을 맞을 때까지 무려 74일동안

17경기에서 18⅓이닝 무실점,무패,무피홈런의 ‘3무 신화’를 이어갔다.

무사 2,3루,1사 만루,어떤 상황에서도 이상훈은 틀림없이 막았다.

 

중간계투와 마무리로 25경기에 나가 2구원승 1구원패 3세이브,방어율 1.04(26이닝 3자책)

선발보다 중간·마무리로서 훨씬 좋은 성적을 냈다.

 

토탈 성적 36경기,6승5패 3세이브,방어율 2.83(95⅓이닝 30자책).
외형적인 성적보다는 내면적인 충실도와 팀 공헌도를 높게 평가받았다.

 

메이저리그로의 꿈을 버릴 수 없었던 이상훈99년일본시리즈를 앞두고 메이저리그 재도전을 선언한다.

당시 재계약을 원했던 주니치" 꿈만 생각하지 말고 현실도 생각해 보라 " 며 만류를 했지만

이상훈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일본에서의 성적도 '비교적' 그의 명성에 걸맞는 성적을 올렸습니다.

 

 

일본 프로야구 성적    그림입니다.

 

년도

경기

승리

패전

세이브

이닝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방어율

1998

Chunichi(1군)

11

1

0

0

32 2/3

12

33

22

17

4.68

1999

Chunichi(1군)

34

6

5

3

94

33

65

30

30

2.87

전체

 

45

7

5

3

126 2/3

45

98

52

47

3.34

 

 

 

 

 

 

 

 

 

 

1999년 주니치 주요 멤버 성적

선동열 39경기 1승 2패 28세이브 31이닝 31피안타 34탈삼진 10볼넷 평균자책점 2.61
이상훈 34경기 6승 5패 3세이브 94이닝 75피안타 65탈삼진 30볼넷 평균자책점 2.84

이종범 123경기 타율 .238 424타수 101안타 9홈런 33타점 24도루 76득점

야마모토 마사 25경기 8승 5패 158⅓이닝 149피안타 116탈삼진 44볼넷 평균자책점 2.96

그림입니다.

일본프로야구 현역 선수중 최고령 야마모토 마사

 

-야마모토는 1965년 8월11일생으로 올해 만 47세입니다. 만40세가 넘는 17명의 일본프로야구 현역 선수 중 최고참 입니다.

27년 동안 주니치에서 통산 210승 160패 평균자책점 3.44를 기록했습니다. 구단과 팬들에게는 정말 상징적인 존재인 선수네요.

 

이와세 히토키 65경기 10승 2패 1세이브 74⅓이닝 67피안타 73탈삼진 22볼넷 평균자책점 1.57

 

그림입니다.그림입니다.

일본 현역 최고 마무리 투수 이와세

 

-현재 일본 현역 최고 마무리 이와세 (일본 통산 최다세이브 기록(313세이브),연봉4억5000만엔 현역 연봉 랭킹1위)



오치아이 에이지 56경기 5승 4패 2세이브 51⅔이닝 43피안타 27탈삼진 9볼넷 평균자책점 2.79

 

그림입니다.그림입니다.그림입니다.

현재 삼성라이온즈 1군 오치아이 투수 코치


카도쿠라 켄 15경기 2승 4패 49이닝 61피안타 38탈삼진 18볼넷 평균자책점 5.69


그림입니다.그림입니다.그림입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한국 프로야구에서도 활동한 카턱

 


가와카미 겐신 25경기 8승 9패 162이닝 162이닝 173피안타 102탈삼진 43볼넷 평균자책점 4.44


그림입니다.그림입니다.

                                                      2010년 가와카미는 악몽이었다.

 

              그림입니다.

 

일본에서 두 번이나 다승왕에 올랐고,2008년 시즌후 자유계약선수(FA)신분으로 34세의 나이에 미국야구에 진출한

가와카미 애틀란타와 3년 2300만 계약 2009년7승 12패 방어율3.86 나름 준수했지만,2010년은 망신 그 자체였다.

첫등판부터 6경기 연속 패배를 당하는 등 9연패를 당한 것. 결국 1승10패 방어율5.15로 시즌을 마쳤고,

팀은 그를 전력 외로 분류하고 마이너로 내려보낸다.

 

       

-한국에서는 많이 알려진 선수는 아니지만, 일본프로야구에서는 꽤 알려진 선수입니다.    

                                                                       

가와카미는 지난 1998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주니치를 역지명해 드래프트 1순위로 입단했다.

첫 해 14승 6패 2.57의 평균자책점으로 신인왕을 거머쥐었고 2004년(17승 7패, 평균자책점 3.32)과

2006년(17승 7패, 평균자책점 2.51)에는 MVP(04S년),배터리상(04년, 06년), 사와무라상(04년), 최우수 투수(04년, 06년),

베스트나인(04년, 06년), 골드글러브(04년, 06년, 07년) 등 온갖 상을 휩쓸었다.

2008시즌 후 자유계약선수(FA) 신분으로 애틀란타로 이적했지만, 메이저리그 통산 50경기 8승 22패 4.32의 평균자책점을 올리는 등

부진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지난 시즌에는 단 한 번도 메이저에 오르지 못하고, 마이너 생활을 계속했다.

그리고 올해 주니치에 4년만에 복귀 하게 되었다.

 


후쿠도메 고스케 132경기 타율 .284 461타수 131안타 16홈런 52타점 76득점 4도루

그림입니다.그림입니다.

            1999년 일본 프로야구 신인왕                  시카고 컵스와 4년간 (4800만달러) 초대형 계약

 

 

그림입니다.그림입니다.그림입니다.그림입니다.그림입니다.

메이저 리그 4년동안 통산 타율0.260 42홈런 161타점

 

-시카고 컵스와 4년계약은 정말 로또 같았군요.현재는 시카고 화이트삭스연봉(100만달러) 1년 계약했다고 하네요.




세키가와 고이치 135경기 타율0.330 172안타 4홈런 60타점 74득점 20도루

 

그림입니다.그림입니다.

SK타격코치(2010년) 현재 한신 타이거즈 1군 외야 수비 주루 코치


1999년 일본 시리즈 우승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의 선수가 많습니다. 은퇴하고 코치로 활동중이신분도 있고,아직 까지 현역으로 뛰는 분도 계시네요.

이 중에서 이상훈 선수가 프로야구 현장(코치진)으로 복귀를 간절히 바랬는데. 예전에 있었던 LG트윈스.코치 제의(생략)

 

 

 

꿈의 미국 메이져 리그 진출

 

 

1999년 


10월        센트럴리그 우승과 함께 미국진출 재시도 선언.

 

12월24일- 보스턴과 옵션 포함 3년 계약 (총액 535만달러)(약64억원)

            사이닝 보너스 105만달러,2,000시즌 연봉 85만달러,2001년 145만달러 등

            2년간 335만달러를 보장하고,마지막 3년차인 2002년에는 구단이 200만달러의

            옵션을 행사하는 계약조건(실질적인 이상훈의 계약 조건은 2년간 335만달러)

 

그림입니다.

지난 2000년 초 보스턴이 매섭게 춥던 날 이상훈은 레드삭스 입단식을 했습니다

댄 두켓 단장과 나란히 선 모습입니다.

 

그림입니다.그림입니다.

 

난 우리 팀 공격이 끝난 후 라이트 뒤에 있는 불펜으로 향했다.

그러던 중 현기증을 느낄 정도로 내 몸이 피곤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제대로 된 피칭을 할 수 없을 정도의 피곤함. 하지만 난 나 자신에게 얘기했다.

"상훈아, 핑계대지마. 그리고 정신차려.

꼭 오늘은 저기에 있는 마운드에 올라가서 던져야해.

저기에 올라가서 던지기 위해 다 버리고 왔잖아.

홈런을 맞아도 괜찮고, 뭘 해도 괜찮아. 너 자신에게만 부끄럽지 않으면"이라고...

<메이저리그 데뷔전에서>

 

 

 

2000년

 

시범경기(11경기)12⅓이닝 동안 1승1패,방어율 4.97을 기록했다.

스프링캠프에서 들쭉날쭉한 경기내용을 보였고 시범경기 투구내용도 인상적이지 못했다.

트리플A 포투켓 레드삭스에서 불펜투수로 첫 시즌을 열게 된다.

 

6월30일  갑작스러운 빅리그 승격

이상훈은 메이저리그 승격 첫날인 30일 볼티모어전 단 1경기에 등판해

⅔이닝 동안 4타자를 맞아 2피안타(1홈런) 1실점(방어율 13.50)을 기록한 바 있다.최고구속 91마일(147km)

 

시즌 개막 후 3개월여를 기다려 메이저리그에 올랐다가 불과 이틀 만에 다시 마이너리그로 떨어진

이상훈은 지금까지 메이저리그를 밟은 한국 선수 중 최단명의 불명예를 당분간 안게 됐다.


7월 2일  이틀만의 마이너리그 행

 

8월30일  이상훈 6경기 무실점(마이너리그 13차례 등판에서 23이닝 무실점)

당시 이상훈 ML승격 왜 늦출까 의혹이 제기 되었다.

이상훈은 트리플A에서 완벽에 가까운 피칭을 해온 터다.

8월 한달간 9경기에 등판해 17⅓이닝 동안 단 1점만 내줘 월간 방어율 0.52이다.

(필자는 기회가 없었다고 본다.한국 선수의 무덤(?)보스톤 아니였더라면 다른팀에서는 더 기회가 있었을텐데...)

 

메이저리그 첫해인 2000년 6월에 이틀 확장 로스터가 적용되는 9월부터

한달 정도 메이저리그에서 선수생활을 하게 됩니다.

 

메이져리그에 승격하면서 초반에는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이후 총 9경기에 등판해

11⅔이닝을 던져 11피안타 5볼넷 6탈삼진 4실점(4자책)을 기록한 이상훈은 9월8일

미네소타전 이후 최근 7차례 등판에서는 9이닝 동안 단 1점만 내주는 안정세를 보여

내년 시즌에 대한 희망을 남겼다.

 

그림입니다.

 

난 꿈을 이루기 위해 어쩌면 모든걸 다 버렸다. 알고있다.

바보같이 보일수 있다는 걸 하지만 이런 소리는 여기 올때 많이 들었다. 미쳤단 소리까지...

사공이 많으면 배는 산으로 가게 되어있다.

난 그저 내손으로 나의 배를 노를 저어서 가고 싶을 뿐이다.

지금도 그러고 있다.

언젠가는 폭풍을 만나 쓰러질수도 있겠지만,

힘이 든다는 이유로 육지에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보스톤에서 방출되던날 이상훈이 홈페이지에 남긴글

 

 

이상훈은 미국에서 실패했는가???

 

냉정하게 본다면, 이상훈선수의 미국도전은 실패라고 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메이져와 마이너시절 기록을 본다면 과연 실패로만 볼수있을까요?

보스톤도 충분히 좌완스페셜리스트로 충분히 활용가치가 있어서 데려온 선수인데

많은 경기에도 투입시키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성적이 아주 나쁜것도 아니였구요.

 

이유는 여러가지로 해석됩니다만,

특히 이상훈이 트리플A 포투켓 레드삭스에서 기록한 우타자 상대 피안타율은 0.157이었다.

왼손투수는 왼손타자에 강하다는 게 야구 상식이다. 그러나 이상훈의 좌타자 상대

피안타율은 0.284  '왼손타자를 잡지 못하는 왼손투수'라는 딱지 때문에 이상훈은 버림받았다.

중간계투치고는 홈런을 많이 허용했다는점,현지 적응실패와 감독과의 불화등

그리고 그 당시 보스톤은 우승이 절박한 팀이라 보스톤은 기회보다는 결과를

원하고 있었던 팀이었습니다. 보스톤 한국메이져리거들에게 무덤이라고 할수있죠.

다른 팀에서 활동했더라면, 조금더 많은 기회를 얻었을텐데 아쉽기만 합니다.

 

이상훈 방출이유는 보스턴과 갈등

 

"생 리가 우리 말을 전혀 듣지 않았습니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극동스카우트 총책임자 레이 포이테빈테가 이상훈의 방출과 관련,

아쉬운(?) 변명을 했다. 이상훈의 보스턴 입단 때 산파역을 맡았던 포이테빈테는 1일

삼성의 애리조나 스프링캠프를 방문한 자리에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이상훈과 구단 사이의 갈등을 털어놓았다.


포이테빈테는 “이상훈이 메이저리그에 처음 올라와 고전했을 때 나는 물론

조 케리건 전 투수코치가 조언을 한 적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상훈의 체인지업에 관한

것이었다”며 “우리는 그의 체인지업이 트리플A에서 통할지는 모르나 홈런타자들이 즐비한

메이저리그에서는 힘들다며 더욱 다듬거나 아니면 또 다른 구질 개발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상훈은 ‘(더 이상의 구질)은 필요없다’며 듣지 않았다”고 공개했다.

 

3년째 옵션계약까지 맺었던 보스턴은 이상훈을 그나마 첫 해 몇 경기에 선보였을 뿐

2년째는 마이너리그에서 거의 내내 머무르게 했다. 포이테빈테의 말은 이상훈 별명이기도 한

‘야생마’기질이 보수적으로 유명한 보스턴과 마찰을 일으켜 메이저 승격 지연과 방출로

이어진 또 하나의 원인이었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포이테빈테는 최근 오클랜드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은 이상훈에 대해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할 수 있는 충분한 자질을 갖춘 투수다”라며 성공을 기원했다.

(2002년 2월3일 당시 기사)

 

 

2001년

 

(시범경기) (5경기) 승패없이 7이닝 11안타(2홈런)8실점 방어율9.00부진(4경기 연속실점)

 

3월 트리플A 포터킷으로 권리 양도.

     ( 보스턴, 이상훈 보류권 마이너에 넘겨,이상훈이 다시 메이저리그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다른 팀으로 이적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당시 보스톤이 연봉 삭감하는 목적으로 이상훈 선수를 웨이버 공시했다는데 가장 유력

 

 

이상훈선수 보스턴 레드삭스 산하 트리플A 포터킷 레드삭스 주요 기록

 

4월26일  5경기 연속무안타 무실점

5월 1일 시즌 첫 세이브 7경기 6⅔이닝 연속 무실점을 기록 (방어율3.86)
5월 8일  10경기 무실점

              시즌 첫 등판에서 3실점한 뒤 이후 10경기에서 9⅔이닝 무실점 행진(방어율 2.70)

5월10일  10경기 연속 무실점 끝 콜롬버스 클리퍼스 (뉴욕 양키스 산하)

6월 3일  시즌 3세이브 더햄 불스 (탬파베이 데블레이스 산하)

6월 6일  1이닝 탈삼진3개 기록 (방어율2,21)

6월 8일  7경기 연속 무실점  2이닝 퍼팩트

             최근 7차례 등판에서 8⅔이닝 무피안타 11K 무실점 (방어율2.01)

         그림입니다.

 

*전반기 까지 비교적 호투하고 있었는데, 끝까지 메이져리그에서 안불러 주는군요...

*이 당시 마이너리그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선수 김선우,조진호 선수가 메이져리그에

 선발투수로 메이져리그와 마이너리그를 오르락 내리락 합니다.

 

7월 1일    두경기 연속패전  1⅔이닝 5피안타 2탈삼진 4실점(4자책)
               앞선 26차례 트리플A 등판에서 패없이 3승 3세이브를 기록했던

               이상훈은 최근 두 경기에서 7점을 내줘 2점대를 바라보던 방어율이 4.59로 올라갔다.

7월19일   이상훈 15일만에 포터킷 복귀(치통)

7월24일   3경기 연속홈런 허용

              최근 3차례 등판에서 홈런 4방을 맞은 이상훈은 방어율이 5.21로 올라갔다.
8월16일   2이닝 무실점…방어율 4점대 회복(4.99)

*마이너리그 후반기에는 이상훈선수가 부진한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단 한번도 메이져리그에

승격시키지 않았던 보스턴 구단은 왜? 이상훈 선수를 영입했는지 정말 답답할뿐입니다.

 

9월3일  보스톤 언론 "이상훈 투자 실패"비난

보스턴 글로브’는 “올시즌 메이저리그 경기에서 단 1이닝도 던지지 않은

이상훈의 연봉이 145만달러로 메이저리그 경기에 출장했던 선수들 중

그보다 몸값이 적은 선수가 10명이나 된다”고 지적. 그 10명 중에는 뉴욕 양키스에서

이적한 데이비드 콘도 포함돼 있다. 이 신문은 또“댄 두켓 단장은 아시아에 가서

또 이상훈같은 300만달러짜리 ‘먹튀(bust)’를 찾아보라” 비아냥.

9월 트리플A 포터킷 이상훈 방출(임의탈퇴) 결정.


 

 

2002년


1월 트리플A 새크라멘토와 계약.
3월 31일 미국야구 포기 선언
4월  8일 LG복귀 선언

 

 

미국 프로야구 성적그림입니다.

 

년도

경기

승리

패전

세이브

이닝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방어율

2000

Boston (MLB)

9

0

0

0

11 2/3

4

6

4

4

3.09

2000

Pawtucket (AAA)

45

5

2

2

71 

24

73

23

16

2.03

2001

Pawtucket (AAA)

43

3

5

4

53

16

44

33

32

5.43

미국 트리플A 전체

88

8

7

6

124

40

117

56

48

4.06

 


 

 

 

 

 

 그림입니다.그림입니다.

 

이상훈, 돌아오다!

 

이상훈은 16일 오후 5시15분 LG 유성민 단장과 함께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흰색 셔츠를 빼고는 검은색 정장에 검은색 구두와 양말, 그리고 길게 자란 머리까지,

온통 검은 색으로 단정하게 차려입은 이상훈은 입국 게이트를 빠져나오자마자 플래카드를 들고

기다린 팬들을 향해 환한 웃음을 지으며 4년 동안의 객지 생활에서 쌓인 피로를 잊었다.

2000년 1월 보스턴 입단이 확정되기 전 귀국한 뒤 2년4개월 만에 느낀 국내팬들의 사랑이었다.
 
이상훈은 기자회견에서 "한국은 내가 설 마지막 무대다.

그러나 처음이라는 기분으로 뛰겠다"며 각오를 밝혔다.

 

잘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겠지만...

최선을 다하는 마음은 변치 않을께요...

18.44 미터에 공을 던질 수 없는 그날까지...

(2002-04-08,이상훈 선수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남긴글 "한국으로"중에서)

 

 

[이상훈걸어온길] LG-주니치-보스턴-LG귀환

97년 9월 미국 진출을 선언한 이상훈은 98년 3월 메이저리그 30개 구단을 대상으로 한

공개 워크아웃을 통해 미국행을 눈앞에 뒀다. 그러나 보스턴이 고작 이적료 60만달러(약 7억8,000만원)

제시하자 LG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이상훈의 해외 진출 방향은 일본쪽으로 급선회했다.

같은 해 4월 2년 임대조건으로 총액 33억원에 주니치 유니폼을 입은 이상훈은 98년 1승(무패)에 그쳤으나

99년 선발과 중간을 오가며 6승5패, 방어율 2.87이라는 성적을 남기고 다시 메이저리거의 꿈을 키웠다. 

2000년 1월 총액 855만달러(약 109억원)에 보스턴에 입단

이상훈은 메이저리그에서 9경기에 나와 승패없이 11⅔이닝 동안 4실점 방어율 3.09를 기록했다.

이상훈은 지난 1월 오클랜드 산하 트리플A 새크라멘토 리버캐츠와 계약했으나

지난 8일 국내 복귀를 공식 선언했다.

 

그림입니다.

 

(52경기) 7승 2패 18세이브 방어율1.68   이닝85 2/3  탈삼진92 (구원4위) (세이브4위)

 

02년 다시 한국으로 복귀한 이상훈 선수.

그위 복귀전은 여전했고 반시즌을 뛰며 1점대의 방어율이라는 괴력을  보여줍니다.

 

 

그림입니다.

<사진설명> 이상훈, 국내 최고 연봉 4억7천만원
국내 프로야구에 복귀한 이상훈이 역대 국내 스포츠 스타들 가운데 가장 많은

4억7천만원의 연봉 계약을 마치고 25일 LG구단 사무실에서 공식 입단식을 갖고 있다.

 

당시 연봉은 국내스포츠 사상 최고금액4억7천만원계약(종전,최고기록-이종범 4억3천만원)

LG이상훈이 국내선수중 유일하게 한국-일본-미국 프로야구를 모두 경험했고,

최근 저조한 팀성적과 침체된 팀분위기를 바꿀수 있을것으로 기대해 최고 최고대우 계약을 체결

(계약기간은 1년,이상훈은 5월 중순 투입예정)


 

시즌 중반부터 친정팀인 LG에서 뛰게된 이상훈은 예전의 넘치는 카리스마를 보여주며

팬들을 야구장에 불러모은다. 등판할 때가 되면 스타킹을 무릎까지 끌어올린 채 마운드를 향해

질주하는 이상훈의 모습은 팬들에게 청량제와 같은 역할을 했다.

 

 

 

 

그림입니다.그림입니다.

 

  

4월  8일 LG복귀 선언
4월 25일 LG입단 계약(연봉 4억 7천만)
5월 17일 이상훈 97년 이후 5시즌 만에 1군 등록 및 복귀 인사

5월 18일시즌 첫 등판 (기아전(잠실) 최고구속150km)-21게임 무패행진

5월 26일시즌 첫 세이브(1구원승) 대구 삼성 3이닝 동안 2피안타 4탈삼진 무실점

7월 14일 복귀후 첫패 잠실 한화전 국내복귀 후 21경기 무패(4승8세이브)

              93년 프로 데뷔 후 한화전 27경기 무패(11승12세이브) 행진 끝.
7월 24일 부산 롯데전 3연속 구원승
9월 24일 잠실 한화전 2이닝 무실점 호투 18세이브(25SP)

 

 

 

아쉬운 2002년 한국시리즈

 

90년 94년 공교롭게 월드컵을 할때 LG는 우승하는다는 속설을 이어질까?


2002년
다시 한번 한국시리즈에 올라간 LG트윈스와 첫 우승을 노리는 삼성라이온즈

결국 이 승부는 이상훈이 일본으로 가기 전인 97년 한국시리즈처럼 연투를 견디지 못한

이상훈이 무너지면서 끝나고 맙니다...

마지막 6차전에서 이미 구위와 체력이 바닥난 이상훈3점차의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9회말 이승엽에게 동점홈런을 맞고, 이어 등판한 최원호가 마해영에게 결승홈런을 허용

한국시리즈를 마감하고 삼성라이온즈는 극적으로 첫우승을 하게 됩니다.


(한국시리즈 6차전) 삼성 6:9 LG 뒤진 9회말 1사 주자 1-2상황

 

LG 이상훈 부터 삼성 이승엽이 극적인동점 3점 홈런을 친다. 

뒤이어 나온 최원호마해영 에게굿바이 홈런

 

삼성은 22년 만에 첫 우승을 맛보고.. 이 홈런을 정말 잊을수 없다.

이상훈 선수에게는 두고두고 아쉬운 잊을수 없는 홈런허용이다.

 

* 당시 이승엽-마해영-양준혁(삼성)과 김재현-이병규(LG)간 성적 비교

-삼성 라이온즈 이승엽-마해영-양준혁 2002년 성적-

그림입니다.

이승엽 타율 0.323 133경기 511타수 165안타 47홈런 126타점 123득점 104사사구 장타율 0.689

그림입니다.

마해영 타율 0.323 133경기 532타수 172안타 33홈런 116타점 92득점 58사사구 장타율 0.592

그림입니다.

양준혁 타율 0.276 132경기 391타수 108안타 14홈런 50타점 60득점 44사사구 장타율 0.453

 

-LG 트윈스 김재현-이병규 2002년 성적-

그림입니다.

김재현 타율 0.334 98경기 296타수 99안타 16홈런 61타점 50득점 72사사구 장타율 0.544

그림입니다.

이병규 타율 0.293 109경기 389타수 114안타 12홈런 43타점 54득점 52사사구 장타율 0.450

 

 

무리한 등판 아쉬운 한국시리즈...

정규시즌에도 팀 사정상 마무리투수로 2이닝이상 던진적도 많았다.

이상훈은 준플레이오프(현대)에서 퍼펙트로 2세이브를 따낸 데 이어

플레이오프(기아) 4경기에 등판,영점대 방어율(0.96)로 1세이브 무패를 기록했다.

이상훈은 여세를 몰아 4일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도 2이닝을 퍼펙트로 막아내며

자신의 시리즈 첫 세이브를 올렸다. 포스트시즌 7경기에서 4세이브 무패 방어율 0.63

무결점 마무리 행진 이때까지만 해도 완벽할 만큼 뒷문을 지켰지만, 그후는 좋지 않았다.

 

그림입니다.

-나갈 수 있겠냐고 묻지 마시고 나가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언제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LG 트윈스의 투수였던 이상훈이 2002년 한국시리즈 당시 3경기 연속으로 등판해서
지쳐있는 상황에 다시 박빙의 상황이 되자 자진해서 불펜으로 향하자
김성근 당시 감독이 "나갈 수 있겠냐"고 질문하자.

 

이상훈은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59개, 5차전에서 23개의 투구수를 기록하며 많이 지쳐 있는

상태였다. 당연히 6차전에는 구속이 많이 떨어졌다. 그러니 누굴 탓하랴! 4차전을 비롯,

전체 포스트시즌에서 이상훈을 혹사(?)보다는 잦은 투구로 이미 지칠때로 지쳤고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는 일이라 하겠다.


02년
 준플레이오프(2경기) 2세이브 방어율0.00  이닝3   탈삼진4  안타 0  자책점0

       플레이오프 (4경기) 1세이브 방어율0.96  이닝9과1/3 탈삼진6 안타 6(홈런1) 자책점1

        한국시리즈(4경기)1세이브 방어율9.95   이닝6과1/3  탈삼진9 안타10(홈런2) 자책점7

 

 

 그림입니다.

 

(55경기) 4승 4패 30세이브 방어율3.34   이닝56 2/3  탈삼진55 (세이브1위) (구원2위)

 

이상훈국내 프로스포츠 사상 최고액6억원에 연봉 재계약했다.

지난해(4억7,000만원)보다 무려 1억3,000만원(27.7%)이 오른 금액이다.

국내 프로스포츠에 연봉 6억원 시대가 열었다.

 

▶이상훈 연도별 연봉

 

연도

93

94

95

96

97

02

03

연봉

1,200

2,400

4,800

10,800

10,800

47,000

60,000

 

야구인생 최대의 오점으로 남는 투구내용 

2003년 초반 마무리 투수로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던 이상훈 선수

6월 8일  시즌 첫패 (1승1패12세이브)

두산전에서 8회초 마무리로 등판하여 1과2/3이닝6안타 7실점한 것을 기점으로

그이후 세이브 실패가 잦아지면서 더이상 예전의 위력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6월20일  통산 11번째 100SP 마산 롯데전 (통산 21구원승·79세이브)

9월22일1군엔트리 제외 시즌마감
            (습관성 오른어깨 탈골증세 왼손가락 혈행장애 악화로  4주약물 치료)

이것이 LG트윈스 유니폼을 입은 이상훈선수의 마지막모습이 될줄이야...

 

 

반강제적으로 SK로 이적된 이상훈...

 

2004년 드디어 이순철 감독체제로 들어섭니다.

LG트윈스는 대대적인 팀을 개편하게 됩니다.

 

자율적인 야구가 문제라며,선수들에게 규율있는 플레이를 하겠다는 이순철 감독

그러나 이순철 감독은 이상훈을 길들일만한 그릇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림입니다.그림입니다.

이상훈은 기자들과 만나 “오래 전부터 팀에서 고름 취급을 받는 느낌을 받았다”면서 “

트레이드는 단순히 기타 문제로 불거진 것이 아니고 구단에서 계획한 것”이라며

엘지구단에 강한 불만을 털어놨다.

 

 

드디어 2003~2004오프시즌에 일이 터져버립니다.

평소에도 기타를 즐겨치는 이상훈과 이순철은 신경전을 버리게 됩니다.

이상훈은 LG트윈스의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팀의 정신적 지주이다.

그리고 이상훈을 길들이겠다는 자체가 모순이라고 볼 수 있다.

LGLG의 모든 영광을 안겨다 준 이상훈트레이드 시켜버립니다.

 

 

그리고 이순철감독이 들어서면서 94년도 신바람 야구의 핵이였던 유지현-서용빈-김재현

어느 하나 제대로 대접을 받지는 못했는걸 생각한다면,김재현 파동,FA미아 유지현

구단과의 관계가 껄끄럽다며 2002년 팀을 한국시리즈까지 진출시킨 김성근 감독 해임,

선동렬을 감독으로 모시기 위해 이광환 감독의 "2선후퇴론

모두 지금의 LG트윈스를 만들었던 프랜차이즈 선수와 감독이다.

 

이런 어운태 전이사장의 생각없는 행동은 한때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LG트윈스가 무너지는 것은 당연 하겠지요.저 역시 그 이후로 두번 다시는 LG트윈스 경기를 안봅니다.

 

월래 프로는 그런가 봅니다.서로 이해관계가 맞는다면,팬들의 바램정도는 무시하는...

그런 냉혹한 세계인가 봅니다...신생팀인 SK는 스타가 필요했고,

LG는 이순철 감독이 원하는 선수들로 어윤태 사장은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이상훈은 꾀나 매력적인 선수였을 것입니다.

SK의 최종규단장은 한때 LG의 이사장을 역임한분,

그렇게 이상훈SK트레이드 되어버렸습니다.

 

 

그림입니다.그림입니다.

           이상훈선수 SK입단식                          시즌 첫 세이브 (SK)

 

그림입니다.

 

(18경기) 0승 3패 1홀드 3세이브 방어율5.14  이닝14  탈삼진15 

 

지난해에도 연봉 6억원을 받았던 이상훈선수에게 SK는 동기부여 차원에서 삭감없이

지난해 연봉과 동일한 액수로 계약하였다.(6억원연봉 제계약)

 

이상훈을 보면 그렇습니다. 어떻게든 팀이 원하는 것보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는 선수

팀에서 내보낸다고 쫓겨 SK반강제적으로 트레이드가 된 이상훈은 야생마의 모습이 아니였습니다.

 

 

그림입니다.

4. 4 - 시즌 첫 세이브(LG전 개막전(인천)1과 2/3이닝 1탈삼진 1볼넷 무실점)(최고구속148km)

4. 6 - 최악의 부진 (한화전(대전) 9회말 6-3 리드상황 2/3이닝 끝내기홈런 포함 4실점 시즌첫패)

4.29 - 시즌 3패 (LG전(잠실) 9회말 3-3 무사 주자없음 동점상황 0.2이닝 1안타 1볼넷 2실점)

 

                                        그림입니다.

                               SK팬, 이상훈 부진에 "6억짜리 방화범" 비난 

 

         4월한달-(10경기 3패 1세이브 9.1이닝 8안타(2홈런) 7볼넷 8실점 방어율7.71)

 

5.13 -시즌 2세이브 (39일 만에 세이브 2세이브 3패 방어율6.17)

 

5.25- 조범현 감독과의 면담에서 "마음도 추스를 겸 2군에 가보라"는 지시를 받아들여2군 행을 결정
        (이상훈 선수가 2군에 내려간것은 97년 7월이후 처음있는일)

 

5.29 - 구단측에 은퇴의사를 전달하고 2군 훈련 불참 

6. 2 - 구단측과의 최종면담에서도 은퇴의사를 번복 하지 않았다. 

 

 

It`s time to say good-bye

 

구위는 예전같지 않았고,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이상훈 선수

이상훈의 은퇴에 대해 많은 팬들이 아쉬움을 표시하고 있다.

그가 "18.44m를 던지지 못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하는

팬들도 있고, 대스타가 팀이 어려운 시점에서 너무 무책임하게 떠나는 게 아니냐는 팬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이 어쩌면 가장 "이상훈 다운" 것이었는 지도 모릅니다.

이상훈은 그저그런 초라한 모습으로 현역생활을 연장하는 것보다는

아직 대스타로서의 여운이 남아있을 때 떠나기를 원했는 지도 모른다.

그런 자존심이 없었다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3억6천만원잔여연봉

포기하는 결단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림입니다.

     이상훈 선수가 은퇴할 당시 남긴말...

 

 

그림입니다.그림입니다.

 

그리고 2년 4개월 이 지나고 잠실에 이상훈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의 오른속에는 글러브가 아닌 기타가 들려져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WHAT]이라는 락커로 변신한 그의 모습을 보며 얼마나 가슴이 뭉클했는지...

 

이상훈은 자기의 고난과 어려운 환경을 야구를 통해 모두 바꿔놓은 선수이다.

대학시절 옥탑방에 어머니와 단 둘이 살면서 자신의 꿈을 위해 모든걸 걸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 지금의 이상훈이 있는 것이다.

그 당시 이상훈이 할 수 있는건 야구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는 그때와는 다른 여유라는게 있다.

 

"기타", "WHAT"

자신의 유일한 취미인 기타를 통해 또 다른 자유와 비상을 꿈꾸는

이상훈은 자신의 밴드를 결성해 공연도 하며 그라운드 외에서도

자유인다운 모습을 팬들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런 이상훈을 팬들은 열렬히 지지하고 있다.

 

 

그림입니다.그림입니다.

 

2004년 록 그룹 왓!을 통해 가수로 정식 데뷔하였다.

 

2009년 게임사가 온라인 야구게임에서 자신의 이름을 가진 캐릭터를 무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은퇴 선수의 퍼블리시티권 문제를 공론화하는 등, 은퇴 선수의 권리 사수에도 주력하였다.

 

그림입니다.

2009년 이후 게임상에서는 이제 이상훈 선수를 볼수는 없다.

 

그림입니다.그림입니다.

2010년 4월 LG트윈스는 이상훈에게 지도자 제안을 했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LG트윈스로 돌아 오지 못하게 됩니다.

이상훈 선수의 팬으로써 그의 현장 복귀를 너무나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또 구단 입니다.

 

그림입니다.

2010년 10월 3일에 서울 잠실에서 서울시 주최로 열린 록페스티벌 공연 중에,

이명박 대통령을 욕하는 발언을 하여 공연이 중단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논란이 일었다.

 

2011년 4월 16일 "47 록 베이스볼 클럽"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소재 사회인 대상  야구교육시설 개장

 

 

                                        그림입니다.

성난 야생마처럼 마운드를 향해 달려가는 그의 모습은

 

나를 타오르게 하는 유일함이었고

 

내삶의 유일한 에너지였다..

 

 

 

그의 인생은 전부 도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려운 형편에 야구를 택한 것도 그렇고,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꿈을 위해 큰무대에 도전한 정신,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길을 가는 과감함까지..... 이런 것만으로도 그가 대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더 이상 할 것이 없고 해줄 것도 없기에 야구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렸다고 밝히는 이상훈.

한국야구의 역사에서 한국락의 역사가 되길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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